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카쿠 덴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중환에 시달리던 [[고모모조노 덴노]]는 후계를 정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'''급사'''하고 말았다. 고모모조노 덴노에게는 황자가 없고 황녀인 요시코(欣子) 내친왕 한 명만 있었다. 이에 급히 4대 [[세습친왕가]] 중 [[간인노미야]]에서 [[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]]의 6남이었던 모로히토 친왕을 사후 양자를 들였는데 그가 바로 고카쿠 덴노였다. 고카쿠 덴노는 고모모조노 덴노의 7촌 아저씨(재종숙부)가 되니, '7촌 아저씨가 조카의 양자가 된 셈'이었다.[* [[조선]]의 경우는 후사가 끊겨 즉위한 방계 왕족이 선왕의 아랫 항렬이 아닌 경우에는 더 선대의 왕들 중 자신의 윗 항렬에 해당하는 왕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이었으나, 일본은 이러한 형태의 예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. 만약 조선식 예법을 따른다고 가정한다면, [[모모조노 덴노]]와 같은 항렬이므로 [[사쿠라마치 덴노]]의 양자로 들어가야 했다.] 고카쿠 덴노는 1780년에 즉위했으며, 요시코 내친왕을 황후로 삼았다. 재위 중에 [[텐메이 대기근]]이 발생하자 고카쿠 덴노는 [[에도 막부]]에게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명령했다. 또한 1811년 [[쿠릴 열도|치시마 섬]]의 측량을 위해 일본에 온 [[러시아]] 군함 디아나호가 [[일본]]에 억류되는 이른바 '''고로닌 사건'''이 발생했을 때는 교섭의 내용을 전부 보고하도록 하는 등 교토 조정의 권위 회복에 노력했다. 막부와 조정 사이의 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가 '''존호 사건'''이다. 고카쿠 덴노는 친아버지인 스케히토 친왕에게 [[태상황]]의 존호를 부여하고자 했다.[* 그 이유는 막부가 제정한 《[[금중병공가제법도]]》에 따르면 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이 고카쿠 덴노의 신하들보다 서열이 낮았기 때문이었다.] 그러나 [[에도 막부]]가 >'황위에 오른 적이 없는 인물이 상황의 칭호를 받은 전례가 없다.' 라는 논리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고, 이 사건은 후에 '''존왕 사상'''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.[* 고카쿠 덴노가 이루지 못한 소원은 [[메이지 유신]] 이후, 증손자인 [[메이지 덴노]]가 스케이토 친왕을 천황으로 추존하면서 비로소 이뤄지게 되었다.] 고카쿠 덴노는 학문에 열심이었으며, 시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했다. 또한 400여 년간 단절되었던 [[교토]]의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(石清水八幡宮)이나 가모 신사(賀茂神社)의 임시제를 재개하고, 조정의 의례를 부활시키는 등 노력했다. 또한, 대학료를 대신하는 조정의 공식교육기관 설치를 구상했으나 재위 중 실현하지는 못했다. 아들 [[닌코 덴노]]대에 와서야 조정의 공식교육기관인 [[가쿠슈인]][* 훗날 일본제국 시기, 이 교육기관은 일본 황족 및 화족 자제 전용의 교육기관이 되었다.]이 설치되었다. 1817년 5월 7일, 고카쿠 덴노는 닌코 덴노에게 [[양위]]하고 물러나 이듬해 5월 9일에 퇴위함에 따라 태상황이 되었다. 1840년 12월 11일,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. 능은 [[교토]]시 히가시야마(東山)구에 있는 센뉴지(泉涌寺, 천용사)에 있다. 사후 '고레이겐인(後靈元院)'이라는 추호(追號)와 원호(院號)가 올려질 예정이었으나 교토 조정에서 900여년만에 한풍 시호와 천황 호칭을 다시 사용하기로 하면서 최종적으로 '고카쿠 덴노(光格天皇)'이라는 시호(諡號)와 천황호(天皇號)가 올려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